들어가며

무언가의 속성을 알게 되면, 대개 그것의 뿌리와 목적이 보인다.

속성이란 겨울에도 여름에도, 보는 사람이 있을 때도 없을 때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속성과 습관을 헷갈린다. 오래 입고 있던 옷을 자기 살갗이라 믿는 것처럼.

여기서는 몇 가지의 속성을 단어로 적어 본다. 문장을 만들기 전에 단어부터 나열하는 것은, 그것이 생각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에서 하나를 묻는다. 우리가 인간의 속성이라 믿어 온 것들은, 정말 속성이었을까.

신의 속성, 그리고 나

무소부재, 무한, 영원, 불변, 자존, 전지, 전능, 권능, 거룩, 공의, 사랑, 자비, 은혜, 긍휼, 오래 참음, 신실, 진실, 선, 지혜, 용서, 창조, 주권, 풍성함, 완전함, 두려움 없음.

신의 속성을 적다 보면 어느 자리에도 부족함이 없다. 모자람도, 두려움도, 비교도 없다. 신은 누구와 자기를 비교하지 않는다. 비교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오래 붙든 질문은 이것이었다. 그 신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

성경은 사람이 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시편에는 “너희는 신들이며”라는 구절이 있고, 예수도 그 말을 다시 인용했다. 불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고, 인도의 스승들은 내 안의 아트만이 곧 브라흐만이라고 했다. 얼굴이 다른 가르침들이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사람은 신적인 것을 품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위의 목록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존재의 설명서가 아니다. 내 안에 심겨진 설계도다. 무한과 영원을 다 쓰지는 못해도, 사랑과 자비와 오래 참음과 창조와 두려움 없음은 처음부터 내 몸 어딘가에 들어 있었다.

나는 신적 존재로 태어났다. 이 문장을 쓰는 데 예순다섯 해가 걸렸다.

자연의 속성

광대무변, 순리, 조화, 순환, 균형, 성장, 발전, 적응, 진화, 다양성, 공생, 풍요, 리듬, 계절, 인내, 회복, 재생, 생명력, 무심, 가차없음, 경계 없음, 서두르지 않음, 끝이 없음.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보리는 보리대로 벼는 벼대로 익는다. 내성천의 금빛 모래도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었다. 수천 년 동안 물이 줄다가 놓고 간 것이다. 자연에서 소멸은 실패가 아니다. 떨어진 잎은 흙이 되고, 흙은 다시 잎이 된다.

자연의 속성 목록에는 ‘부족’이 없다. 봄은 꽃을 아끼지 않고, 강은 물을 아끼지 않는다. 자연은 풍요를 기본값으로 쓴다.

그리고 사람의 몸은 그 자연에서 왔다. 내 몸의 물은 내성천을 흘러간 물이고, 내 뼈의 칼슘은 언젠가 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광대무변한 것이 내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것의 한 조각이다. 그러니 자연의 속성 또한 내가 타고난 것이다.

사랑의 속성

나눔, 온유, 오래 참음, 용서, 헌신, 희생, 존중, 신뢰, 배려, 공감, 연민, 기다림, 믿음, 소망, 격려, 보호, 기쁨, 자랑하지 않음, 성내지 않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 대가를 바라지 않음.

아기는 사랑을 배우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웃고, 안기고, 누구에게나 손을 낸다. 비교도 계산도 없다. 사랑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지 않아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의 속성은 사람의 초기값이다.

상리아재는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잔치집에서 받은 떡을 두루마기 주머니에 넣어 왔다. 담배가루가 묻은 채였다. 글자 한 자 못 배운 사람에게도 그 속성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성공의 속성

부, 성취, 품위, 명예, 자유, 여유, 풍요, 영향력, 자신감, 집중, 꼴기, 용기, 실행, 절제, 감사, 격손, 나눔, 배움, 신용, 창조, 시작하는 힘, 끝내는 힘, 다시 일어서는 힘.

성공의 속성을 신의 속성 옆에 놓아 보면 놀라울 만큼 겹친다. 창조, 풍요, 자유, 두려움 없는 실행. 성공이란 어쩌면 밖에서 구해 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속성이 가린 것 없이 드러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생기는 물음이 있다. 성공이 우리의 속성이라면, 왜 대부분의 사람은 성공하지 못하는가.

실패의 속성

비교, 남탓, 경쟁심, 부정, 두려움, 결핍, 조급함, 시기, 질투, 변명, 미룸, 우물쭈물, 포기, 자기연민, 자기비하, 교만, 욕심, 집착, 후회, 불평, 의심, 고집, 체념, 배우지 않음, 듣지 않음, 인정하지 않음.

이 목록을 앞의 목록들과 나란히 놓고 하나를 알아차렸다. 여기 있는 단어 가운데 신의 속성에도, 자연의 속성에도,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교하는 아기는 없다. 체념한 아기도, 자기를 비하하는 아기도 없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은 어디서 왔는가.

배운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하지 마라.’ 만지지 마라, 가지 마라, 울지 마라, 나서지 마라, 너는 안 된다, 분수를 알아라. 상리아재의 불호령도 그랬다. 호롱불 아래서 숙제를 하는 아이들에게 떨어지던 “불 끄고 자라.” 기름값이 무서웠던 가난이 아이들의 밤을 먼저 끌 때가 있었다.

그 말들은 대개 사랑에서 나왔다. 다치지 말라고, 굶지 말라고, 상처받지 말라고. 그런데 그 뿌리를 더 내려가 보면 두려움이 있다.

수만 년 전, 사람은 풀숲이 흔들릴 때마다 달아나야 했다. 바람일지도 모르는 그 소리를 맹수로 여긴 사람만이 살아남아 자식을 낳았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먼저 보고, 기회보다 위협을 먼저 기억하는 버릇은 그렇게 대대로 물려져 왔다. 생존을 위한 두려움은 한때 우리를 지켜 주었다. 그런데 맹수가 사라진 뒤에도 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상만 바꿈다. 남의 시선, 실패, 가난, 내일.

그렇게 사람은 조금씩 자기를 가뒀다. 누구가 가둔 것이 아니다. 배운 대로, 두려운 대로 스스로 울타리를 친 것이다. 하지 마라는 말을 너무 오래 들으면, 나중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에게 그 말을 한다.

조르바 앞에서 꿈을 접고, 프루스트 앞에서 기가 죽던 내가 그랬다. 누구도 나에게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나에게 말했다. 너는 안 된다고.

그러니 실패의 속성은 인간의 속성이 아니다. 인간이 두르고 살아온 울타리의 속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속성

인간의 속성은 양면성을 띠고 있다. 역사를 봐도 땅을 봐도 그렇다. 폭력과 난폭함이 우세할 때 사회는 전쟁과 경쟁과 착취로 가득찼고, 자유와 평화가 우세할 때 사람들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남의 아이까지 거두었다. 같은 사람들이었다. 같은 땅에서, 불과 몇십 년 사이에.

그런데 양면을 나란히 적어 보면, 두 칸의 출신이 다르다는 것이 보인다.

타고난 것 (신과 자연에게서)

배운 것 (두려움과 금지에서)

사랑

증오

나눔

착취

창조

파괴

풍요

결핍

용서

복수

온유

폭력

조화

경쟁

공생

지배

격손

교만

신실

배신

진실

기만

오래 참음

조급함

감사

불평

자유

속박

평화

전쟁

성장

체념

두려움 없음

두려움

완전함

비교

왼쪽 칸은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있다. 오른쪽 칸은 없다. 오른쪽 칸은 살면서 하나씩 쌓인다. 우리가 인간의 양면성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타고난 속성 위에 배운 습관이 덧씩워진 모습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오른쪽 칸에서 산다. 비교하고, 두려워하고, 결핍을 세며 산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라고 믿는다. 오래 입은 옷을 살갗이라 믿듯이.

실패와 가난 속에 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질도, 속성도 아니다. 사람이 두르고 사는 울타리의 모양일 뿐이다.

깨달음

어릴 적 읽은 『아라비안 나이트』에는 가난한 소년 알라딘이 나온다. 그는 낡은 램프 하나를 얻는다. 램프를 문지르자 지니가 나타나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한다.

어릴 때는 지니가 부러웠다. 지금은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온다. 지니는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기 전에도 거기 있었다. 램프가 낡아 보였을 뿐, 그 안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이루는 힘이 들어 있었다. 알라딘이 가난했던 것은 지니가 없어서가 아니라, 지니가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 밑바닥에 지니를 갖고 있다. 신에게서 받은 완전함과, 자연에게서 받은 광대무변함. 앞에서 적어 내려간 왼쪽 칸의 단어들이 모두 그 램프 안에 있다. 다만 사용법을 모를 뿐이다.

그 사용법의 첫 장은 아마 이럴 것이다. 속성과 습관을 구별하는 것. 내 안의 비교와 두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나라고 믿지 않고 ‘이것은 내가 배운 것이다’라고 알아보는 것. 칼 융은 사람이 자기 안의 어두운 면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온전해진다고 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에 무릎 꿇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보고,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울타리는 울타리인 줄 알아보는 순간부터 더는 벽이 아니다.

두 번째 장은 오래 들어 온 ‘하지 마라’를 하나씩 되돌려 보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기숙사 구석방에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붓을 혼자 들었던 날처럼. 그때 나는 사용법을 몰랐지만 램프를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고르는 것이다. 표의 왼쪽과 오른쪽 가운데 어느 쪽에서 살지를, 매일 아침 고르는 것. 신에게도 자연에게도 없는, 오직 사람에게만 주어진 속성이다.

속성을 알면 뿌리와 목적이 보인다고 했다. 인간의 뿌리는 신과 자연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목적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깨달음이라 부른다. 새로운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알아보는 것. 램프는 처음부터 내 손에 있었다.